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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내란 특검, 김성회 민주당 의원 참고인 조사···국민의힘 의원들은 ‘불응’ |
| 내용 | 김성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일 국회 계엄 해제 의결 방해 의혹을 수사 중인 조은석 내란 특별검사팀에 출석했다. 특검팀이 민주당 의원에 대해 참고인 조사를 한 건 이번이 두번째다. 국민의힘은 앞서 참고인 조사를 마친 조경태·김예지 의원을 제외하고 특검의 조사 요청에 일체 응하지 않고 있다.
특검팀은 이날 김 의원을 특검팀 사무실이 있는 서울 서초구 서울고검으로 불러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했다. 특검팀은 김 의원을 상대로 계엄 당시 국회 봉쇄 상황과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 표결 과정을 물어본 것으로 전해졌다.
김 의원은 이날 특검팀에 출석하면서 “국민의힘 관련자들은 특검에 출석해 참고인은 참고인대로, 피의자는 피의자대로 성실히 수사에 임해야 한다”며 “특검이 없는 죄도 만들어 씌운다는 주장은 굉장히 곤란한 말씀”이라고 말했다. 그는 “12월3일 계엄 당일 국회 담장을 넘어 들어가 의결이 이뤄지기까지의 과정을 제가 본대로 가감 없이 특검에 설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 표결에 참석해 찬성표를 던진 190명 중 한 명이다. 계엄 당시 민주당 텔레그램 단체대화방에 국회 출입 가능 사실과 서울 영등포경찰서가 국회경비대로부터 연락받은 게 없다는 사실을 공유했다.
앞서 백혜련 민주당 의원도 지난 18일 민주당 의원 중 처음으로 내란 특검팀의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백 의원은 계엄 당시 시민들 도움으로 봉쇄된 국회의사당 담을 넘어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 표결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검팀은 추경호 전 원내대표 등 당시 국민의힘 지도부가 지난해 12월3~4일 당 소속 의원들의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 표결 참여를 방해했다는 의혹을 수사 중이다. 당시 국민의힘 의원 108명 중 90명은 여의도 중앙당사와 국회 본청에 흩어져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추 전 원내대표 등이 윤석열 전 대통령의 연락을 받고 당 소속 의원들의 표결을 방해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추 전 원내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서 “계엄 당일 우원식 국회의장과의 통화에서 당사에 있는 의원들이 국회에 들어올 수 있도록 조치해달라고 요청했다”며 의혹을 부인했다.
특검팀은 앞서 참고인 조사를 받은 조경태·김예지 의원 외에 다른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참고인 조사를 요청했으나 현재까지 회신받지 못한 상황이다. 박지영 특검보는 이날 브리핑에서 “국민의힘 의원 중에선 추가적으로 조사를 받겠다고 하신 분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 국민의힘 의원은 특검의 국민의힘 참고인 조사 요청에 대해 “조사 실익이 없다”며 “이미 다 나온 사실인데 가서 얘기할 게 뭐가 더 있겠나”라고 말했다.
국민의힘은 통일교 교인들의 국민의힘 당원 가입 의혹을 수사 중인 민중기 특별검사팀의 당사 압수수색 집행에도 협조하지 않고 있다. 오정희 특검보는 이날 브리핑에서 국민의힘 압수수색 영장 기한이 오늘까지인데 협의가 진전됐는지 묻는 취재진 질문에 “협의는 안 되는 상태”라며 “향후 상황을 어떻게 할지는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민중기 특검팀은 지난 13일과 18일 국회를 찾아 통일교인 명단과 국민의힘 당원 명부를 대조하는 압수수색 영장 집행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으나 국민의힘이 반발해 무산됐다.
배드민턴 국가대표 서승재(28)와 김원호(26·이상 삼성생명)는 지난해 프랑스 파리에서 잊지 못할 명승부를 치렀다. 각각 채유정, 정나은과 짝을 이뤄 파리 올림픽 배드민턴 혼합복식 4강전에서 맞대결했다. 2게임과 3게임, 연속해서 듀스 승부가 나왔다. 경기 막판 메디컬 타임을 요청해 주머니에 구토를 했던, 말 그대로 토할 만큼 뛰었던 김원호가 정나은과 함께 서승재-채유정을 꺾고 결승에 올라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둘은 지금 코트 같은 편에 나란히 서서 땀 흘리고 있다. 올림픽 이후 서승재는 남자복식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올림픽 혼합복식 4강에서 맞붙었던 김원호와 새로 조를 꾸렸다. 왼손잡이에 후위 공격이 특히 강한 서승재, 탄탄한 수비와 네트 플레이가 돋보이는 오른손잡이 김원호의 시너지 효과는 기대 이상으로 컸다.
둘은 올해 주요 국제대회만 4차례 우승했다. 조를 이루고 불과 7개월 만인 지난달 세계랭킹 1위까지 올랐다. 한국 배드민턴이 남자복식에서 세계랭킹 1위를 차지한 것은 2016년 이용대-유연성 이후 9년 만이다.
서승재와 김원호는 오는 25일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의 정상을 노린다.
서승재는 2023년 덴마크 코펜하겐 세계선수권에서 남자복식과 혼합복식 1위를 휩쓸었다. 여자단식 세계 최강 안세영과 함께 대회 2연패에 도전한다. 김원호는 세계선수권 첫 우승을 위해 나선다.
현역 시절 남자복식 전설이었던 박주봉 대표팀 감독은 “남자복식은 서로 파트너를 믿고 자기 역할을 다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서승재와 김원호 둘 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대단하다.
18일 진천선수촌에서 열린 배드민턴 대표팀 미디어데이에서 서승재는 지난해 파리 올림픽을 떠올리며 “(김)원호와 세계선수권에 같이 나가는 것은 처음이다. ‘파리에서 네가 더 잘했으니 나를 이끌어서 좋은 성적 낼 수 있게 하자’고 했다”고 말했다. 곁에 앉은 김원호는 “(서)승재 형이 2023년 세계선수권에서 이미 우승을 했다. 2연패를 할 수 있도록 돕겠다”면서 “형이 이미 우승을 해봤으니까 ‘믿고 따라가겠다’고 했다. 올림픽 때는 적이었지만, 이제는 한편이라 더 든든하게 믿고 플레이할 수 있는 것 같다”며 웃었다.
서승재-김원호는 세계랭킹 1위로 처음 참가한 지난달 중국오픈 8강에서 인도네시아 조에 졌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박주봉 감독은 “남자복식 경쟁 상대인 인도네시아, 중국 선수들과는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봐야 한다”며 “최근에는 전위 싸움이 특히 강하다. 김상수 코치와 선수들이 그런 부분을 집중적으로 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배드민턴은 2023년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 3개, 동메달 1개를 따내며 역대 최고 성적을 냈다. 이번 대회는 남자복식 서승재-김원호와 여자단식 안세영이 2연패를 노린다.
혼합복식은 새로 조를 꾸린 채유정과 이종민이 어느 정도 성과를 낼 수 있을지 경쟁력을 확인한다. 채유정은 2023년 대회 당시 서승재와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종민은 올해 19세, 대표팀 최연소다.
9268개. 공장, 탄광, 지하시설 등 일본 제국주의(일제)가 한반도에 남긴 전쟁유적 숫자다. 문헌과 현지조사 등으로 확인된 곳 중 정부나 지자체 보고서가 발간된 곳은 321개. 일제가 36년간 남긴 상처 중, 약 3.46% 수준이다.
일제강점기 전쟁유적은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등과 연결되지만 지금껏 채 5%도 조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가 ‘야만의 시대’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증언’ 덕분이었다.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폭로한 ‘김학순’, 일본제철(구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강제동원 책임을 물은 ‘이춘식’ 등의 증언은 광복 후 수십 년간 역사의 빈틈을 메웠다.
그로부터 80년이 지났다. 생생했던 ‘목소리’는 대부분 멈췄다. 이들이 세상을 떠나며 생긴 틈으로 “강제동원도 일본군 ‘위안부’도 없었다. 증언은 거짓이다”는 주장이 파고들었다. 이제라도 멈춰버린 증언을 사실로 확인해야만 할 필요성이 커졌다.
경향신문은 정부가 발간한 구술록 속 강제동원 피해자 219명의 증언을 처음으로 전수 분석했다. 그들의 기억으로 지난 80년간 한 번도 알려지지 않았던 ‘강제동원의 길’을 복원했다. 전국 역, 관공서, 학교, 여관 등에서 집결한 강제동원자들은 기차를 타고 여수역, 부산역 등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연락선으로 갈아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전국 주요역과 철도는 이들을 수송하는 핵심역할을 했다. 항구는 이들을 강제동원지로 실어나르는 기지였다.
219명의 기억을 쫓아 직접 따라가 본 길 위에는 참혹한 ‘폭력’의 역사가 있었다.
김희경은 덕수국민학교 고등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4년 7월, 일본 후지코시강재주식회사로 강제동원됐다. 만 14세 때였다. 250명이 함께 동원됐는데 집결지는 ‘경기도청’(현 광화문 광장 남쪽)이었다. 이들은 ‘부민회관’(현 서울시의회)에서 일제를 홍보하는 영화를 한 편 봤다. 오후에는 ‘조선신궁’(현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으로 이동해 참배한 뒤 ‘경성역’(서울역)으로 걸어서 이동했다. “남대문을 내려보니까는 요즈음 시청광장에 사람 모이잖아요. 가족들이 그렇게 모여있어요. 아침에 아무것도 없이 나갔는데 도시락들을 싸가지고, 애들을 멕여 보낼라고. 서울역 가는 그 일대가 꽉 차서, 그걸 말로 표현을 못 해요.” 김희경은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는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위원회)가 2008년 발간한 구술집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그 경험과 기억’에 나오는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위원회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총 16권의 구술기록집을 남기고, 2015년 해체됐다. 정부가 발간한 책이지만 전권 열람이 가능한 곳을 찾기 어려울 만큼 구술집은 잊혔다. 그런데 이 책들에는 어디서도 듣지 못한 이야기가 조각조각 실려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끌려간 ‘이동 경로’에 관한 것이다.
다시 김희경의 증언이다. 경성역에 도착한 그는 그날 저녁 8시, 기차를 탔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비 내리는 새벽이었다. “아마 새벽쯤 됐어, 비가 막 부슬부슬 오는데 250명이 춥고, 앉아가지구선 있는데, 한 아이 두 아이 울기 시작하더니 250명이 다 우는 거야.” 이날 가족품을 떠나 온 아이들이 함께 울었던 곳은 ‘부산역’이었다.
일제강점기 부산은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관문이었다. 부산항 제1부두에는 ‘관부 연락선’이 닿았다. “연락선이 단순히 일본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연결한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일본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면 곧바로 기차로 갈아타고 중국을 갈 수 있다는 의미의 ‘연락’ 입니다. 역이나 항구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거죠,”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은 당시 부산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 한반도, 중국을 연결하는 구조의 핵심은 ‘잔교역’이었다. 잔교역은 부두 위에 건설한 간이역을 말한다. 기차에서 내린 승객이 몇 걸음만 옮기면 곧바로 배에 오를 수 있다. 모든 환승과정이 역과 항구안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한 극도로 효율적인 구조지만 뒤집어보면 완벽히 통제된 구조다.
그런데 김희경은 잔교역이 아닌 부산역에서 하차했다. 경부선에서 갈라져 나온 철도가 잔교역과 이어짐에도 부산역에서 하차했다면, 그 이유는 하나일 수밖에 없다. 일제는 김희경을 비롯한 250명의 아이를 역 밖으로 데리고 나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부산으로 이동해 곧바로 ‘관부 연락선’을 탔을 것이란 추측은 시작부터 깨졌다. 증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김희경의 기억이 부산에 이르러 희미해졌다는 것이다. 만 14세 아이가 처음 가 본 도시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억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219명의 증언자 가운데 비슷한 시기, 같은 장소를 거친 증언을 전부 찾았다. 그 결과, 1944년 5월 도쿄 누마즈공장으로 동원된 오일순, 1944년 10월 히로시마 조선소로 동원된 홍순의가 특정됐다. 같은 해 5월, 7월, 10월에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끌려간 이들의 기억에서 하나의 장면이 공통적으로 떠올랐다. 이들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인간 소독’이었다.
“자그마한 배를 타고 어느 도섬에 가니께네, 창고 같은 이런 데가 있었어요. 들어가보니까 새카만, 저 소독수라 소독수. 그 안으로 들어가라 하는 거예요”, “어딘지 들어갔는데 아 소독물 저저저, 모야 냄새 지독한 크레졸. 우유물 같이 허연 물에 넣고 소독시키는 거야, 몸을”, “약물로 소독을 했다고 사람을”.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시기 부산에 머물렀지만 마치 한 공간에 있었던 것처럼 말했다.
이들 증언이 맞다면 ‘강제동원의 길’에는 소독이라는 과정이 추가돼야 했다. 문제는 장소였다. 누구도 소독을 당한 위치를 정확히 특정하지는 못했다. 다만, ‘소독하러 가는 길’을 묘사한 경우가 있었다. “부산에서 그 오륙도 지나설랑 조금 더 가면 조그만 섬이 있었어요, 그 섬에 들어가서 약물로 소독을 했다고 사람을”(김민경, 1944년 히로시마 기계제작소 동원), “부산 와가지고 지금은 모르겠는데, 어디 섬인데 부산에. 섬에 가서 우리를 소독을 시키는기라”(박군자, 1944년 도쿄 누마즈 공장 동원). 이들 증언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설명은 그곳이 ‘섬’이라는 것이었다.
옛 부산역 근방, 자그마한 배로도 갈 수 있는 거리, 오륙도를 볼 수 있는 방향에 있는 ‘섬’. 1941년 일제가 제작한 부산 시가지도를 구해서 펼치고, 해당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곳을 찾았다. 딱 한 곳이 나왔다. 부산 ‘영도’다.
일제강점기 영도는 배를 건조하고, 수리하는 조선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현재 ‘깡깡이 마을’로도 유명한 해안가 일대에는 일본인 조선소가 밀집해 있었다. 1934년에는 최초의 도개교(다리 상판 한쪽을 올려 배가 지나갈 수 있게 한 다리)인 영도다리가 건설됐다.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만나는 대교동·남항동 일대와 ‘영도정’이라 불린 봉래동·청학동 일대는 대표적인 일본인 거주 지역이었다.
영도의 산업적 특성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 영도에는 조선업을 지탱할 ‘노동력’이 필요했다. 영도에도 강제동원자가 있었고,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창고 ‘건물’이 있었다면 ‘창고가 있는 섬’이라는 소독 과정을 설명한 증언과 맞아떨어진다.
지난 1일, 영도에서 만난 박호석씨는 이렇게 말했다. “있었습니다. 2층짜리 건물이었는데 해방 후 사람들이 들어가서 살기도 했습니다. 그 건물을 허물고 1969년에 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박씨가 지목한 곳은 부산 영도구 봉래동2가에 있는 ‘봉래 아파트’ 자리였다.
인근 주민들은 이곳을 ‘근로 보국대 기숙사’라고 불렀다. 근로 보국대는 일제가 시행한 강제동원의 한 갈래였다. 위치를 확정하기 위해 마지막 교차검증을 했다. 1952년 미군이 영도를 찍은 사진을 입수해 똑같은 구도로 영도를 촬영했다. 그리고 두 사진을 천천히 겹쳤다. ‘봉래 아파트’ 위로 또 하나의 건물이 겹쳐졌다. 이른바 ‘나가야식 숙소’라고 불리는 기다란 형태의 ‘목조’ 건물. 영도 ‘근로 보국대 기숙사’였다.
영도를 소독 장소로 특정하자 신빙성 없어 보였던 증언도 해석됐다. 홍순의는 “부산 건너 대마도라는 데가 있어, 목선 타고 건너가는데 거기가 얼마 안돼요. 인제 거기에 가서 목욕(소독)하는거요”라고 증언했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직선거리는 약 50㎞ 정도인데 이른바 ‘쓰시마 해류’라고 불리는 강하고 빠른 해류가 흐른다. 나무배를 타고 가깝다고 느끼며 왕복했다고 보긴 어렵다. 반면, 부산 중구 일대에서 영도까지 최단거리는 불과 200m정도다. 영도다리가 놓이기 전부터 나무배가 영도와 부산을 이었다. 홍순의가 영도를 대마도로 착각했다고 하면, 증언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다.
그럼에도 반드시 설명돼야 할 의문 한 가지가 남는다. 증언자들이 강제동원 된 시점은 1944년이다. 이때는 이미 영도다리가 있었다. 증언자들은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갔다”고 일관되게 말했다. 답은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 연구위원이 내놨다. “영도다리를 걸어서 건너면 곧바로 일본인 거주지가 나옵니다. 조선인 징용자는 결코 이곳을 지나가지 못했을 겁니다. 일제는 이들을 미개하고 불결한 존재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실제로 일제는 조선인이 ‘전염병’을 퍼뜨릴 가능성을 극도로 경계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관보, 신문 기사 등에는 “조선인은 불결하고 전염병의 온상”이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됐고, 이를 근거로 일본인 전용 목욕탕·공원 등의 출입 제한이 이뤄졌다. 결국, 1940년대 관점에서 보면 조선인 강제동원자가 배를 타야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위원회 조사관으로 소독 과정에 대한 구술을 받은 허광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소 소장은 피해자들의 증언 당시 모습을 이렇게 회상했다. “증언을 듣는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일본으로 도항하기 직전, 알몸으로 벗겨진 채 소독을 당했다고 설명하는 모습입니다. 그 경험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모욕적이었는지 이미 6~70년이 지났음에도 증언자들 기억 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일본인도 소독을 받아야 연락선에 오를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없습니다.”
영도에서 소독을 마친 이들은 다시 부산항 제1부두로 끌려 나왔다. 그제야 관부연락선을 탈 수 있었다. 덕수초 → 경기도청 → 조선신궁 → 경성역 → 부산역(현 부산 중앙동 교보생명빌딩) → 영도 근로 보국대(봉래 아파트) → 부산항 제1부두(구 부산 국제여객터미널) → 관부연락선 → 일본 시모노세키로 이어지는 강제동원 주요 경로 중 하나가 비로소 완성됐다. 이 길은 1944년 7월, 서울에서 동원된 김희경이 실제로 걸었던 길이다. 구술록에 기록된 1943~44년 서울 출신 강제동원자들도 거의 예외 없이 같은 동선을 밟았다. 답사 결과, 서울 시내 구간은 도보로 약 2시간, 부산역에서 영도 근로보국대까지는 2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직접 따라가 본 ‘강제동원의 길’은 몇 가지 분명한 의미를 드러냈다. 우선, 도주를 막으면서 목적지까지 신속히 수송하기 위한 최적 경로였다. 예를 들어 집결지로 이용된 여관, 역, 항구는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곳에 있었다.
수송 수단으로 사용된 ‘철도’는 조선총독부 산하 철도국에서 관할 하며 감시와 통제를 극대화할 수 있는 도구였다. 철도는 항구와 함께 ‘일제가 한반도를 근대화했다’는 증거로도 활용된다. 그러나 이 철도 위에서 당시 강제동원자들은 목숨을 건 탈출을 했다. 김명환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식으로 탈출을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1942~1945년까지 홋카이도탄광기선주식회사가 노무자 송출 현황을 기록한 ‘부산왕복’이라는 자료에 따르면 1944년 한 해, 경성역에서 부산역으로 이동하던 강제동원자의 탈출률이 42%에 달했다. 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갔다면 설명되지 않는 수치다.
이동 과정의 처우 역시 민족 차별적 성격을 드러낸다. 기차로 이동하면서 “객실에 앉아서 갔다”는 증언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인제 어디다가 싣느냐. 짐차여 사람타는 차에는 안 태우고, 소새끼 태우는 곳간이여. 튀지 못하게 할라고, 그거는 인간 타는 데가 아니에요.” 만 15세에 강제동원된 권석순은 기차 안 풍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화물칸으로 수송한 이들을 소독까지해서 배애 태우는 과정을 종합하면, 일제가 당시 조선인 강제동원자을 어떻게 인식했는지가 드러난다.
경향신문이 분석한 219명 중 176명은 김희경처럼 자신이 끌려갔던 이동과정을 일부라도 구술했다. 이들이 증언한 경로는 크게 평양/서울/춘천/서산/부여/전주 → 대전역 → 부산역 → 부산항 제1부두 → 관부연락선 → 일본 시모노세키, 익산/군산/장성/순천/순창/고흥 → 여수항 → 관려연락선 → 일본 시모노세키, 목포 유달 국민학교 → 목포 선창 → 소안도/추자도 → 제주도/우도 강제동원 등이다. 독특한 점은 관려연락선이 있었음에도 전라도 지역에서 부산으로 이동해 일본으로 가는 경우도 많았다는 점이다. 조건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부산에서 출발해 일본으로 가는 정기항로가 경제적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면서도 “1944년 후반이면 이미 해안선이 봉쇄돼 이동 중 배가 격침될 가능성이 컸다는 점 역시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강제동원자들의 이동 경로, 증언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많다. 그럼에도 이를 활용한 진상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할 수 없었어요. 증언을 정리해 후속 연구가 가능하도록 해야 했지만 그럴 시간도 예산도 없이 위원회가 해체됐습니다.” 위원회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한 정 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 정부는 이들의 ‘증언’을 확인해 객관적 역사로 남기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 광복 후 80년이 지나도록 우리는 정확히 몇 명이 끌려가서 몇 명이 돌아오지 못했는지조차 모른다.
국방부가 12·3 불법계엄에 관여한 부대들을 대상으로 당시 부여받은 임무와 역할을 조사한다. 불법 행위가 확인된 군인은 형사처벌·진급 누락을 받을 수 있다. 64년 만에 군 장성 출신이 아닌 문민 출신으로 국방부 장관에 취임한 안규백 장관이 군 내부 통솔력을 높이려는 시도라는 해석도 나온다.
국방부는 19일 “국방부 감사실 주관으로 국방부 조사본부(옛 헌병)의 지원하에 계엄 당시 출동했거나 관여한 부대들에 대해 계엄 임무와 역할 등 사실관계를 확인 중”이라고 밝혔다. 국방부 관계자는 “계엄 과정 전반을 두루 확인해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고, 개선이 필요한 부분은 보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조사 범위는 계엄 당시 병력을 출동한 부대를 비롯해 국회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를 통한 내란혐의 진상규명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국조특위) 조사 과정에서 언급된 부대 등이다. 계엄 당시 실제 출동하지 않았어도 출동 준비를 했던 부대, 계엄사령부 구성을 준비했던 인원, 합동참모본부 지휘통제실에 있었던 인원도 조사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
국방부는 20여명의 감사 인력을 투입해 부대 기록을 확인하고 관련자 진술을 듣는다. 조사 기간은 1~2개월로 예상되나 진행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조사 과정에서 위법 행위가 발견된 군인은 형사처벌이나 진급 누락 등의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이번 조사는 계엄 관련 내란·외환 의혹을 수사하는 조은석 내란 특별검사팀 수사와 별개로 진행된다. 국방부 관계자는 “수사에 영향이 없는 범위 내에서 진행될 것”이라며 “군 차원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앞서 안 장관은 지난달 25일 취임사에서 “계엄의 도구로 소모된 과거와 단절”을 강조했고, 지난달 15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불법 비상계엄에 관해 신상필벌을 하고 전 정권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조사는 국방부가 지난달 착수한 비상계엄 관련 포상 대상자 발굴 조사보다 그 범위가 클 것으로 보인다. 불법 행위를 확인하는 작업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앞서 국방부는 지난달 18일 계엄 당시 위법한 명령에 따르지 않은 군인을 찾아 승진 인사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부당한 지시에 소극적으로 임했던 간부들에 대해 특진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다만 특진 대상자는 최소화될 것이라는 게 군 내부의 대체적인 분위기다. 계엄에 관여하지 않은 부대에 속한 간부들과 형평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이번 조사가 군부 숙정을 위한 정지작업이 아니냐는 시각에는 선을 그었다. 국방부 관계자는 “분위기를 쇄신하고 군을 안정화하려는 차원의 조사”라고 말했다. 군 일각에서는 합참의장 등 군 고위 장성 인사를 앞두고 군 지휘부의 대거 교체를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9일 양도소득세를 내는 대주주 기준 논란과 관련해 “다양한 의견을 듣고 지금 심사숙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 부총리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대주주 양도세 기준에 대한 정부 입장이 언제 결정되느냐는 질의에 “제가 여러 가지 상황을 보고 판단할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기재부는 지난 달 양도소득세 부과 대상인 대주주의 종목당 주식보유액 기준을 50억원에서 10억원으로 강화하는 내용의 세제 개편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코스피 5000 시대라는 기조에 역행한다’는 개인 투자자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10일 50억원 기준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취지의 의견을 정부에 전달했다.
김병기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13일 유튜브에서 “다음 주초 정도엔 정부에서 결론을 내리지 않을까 싶다”고 발언했다. 기재부는 이날 국회 업무보고에서 대주주 양도세 기준 관련 내용을 포함하지 않았다. 구 부총리가 민주당의 의견을 받아들여 다음 주중 현행 50억원 체제를 유지하는 안을 받아들이리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구 부총리는 윤석열 정부 당시 완화한 부동산 세제를 원상 복구하는 내용이 이번 세제개편 안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지적에는 “여러 가지 상황을 보면서 종합적으로 판단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경제정책을 운용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덧붙였다.
정부의 법인세 인상안이 기업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야당의 주장을 두고는 “지출 측면에서 내년 예산안을 통해 훨씬 더 많이 지원해주려고 한다”고 답했다.
구 부총리는 노조법 2·3조 개정안(노란 봉투법)이 국회를 통과하면 노사 쟁의가 늘어날 것이라는 야당의 질의를 두고는 “노사 간의 정상화 개념도 봐주셔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는 “기업들이 우려하지 않는 수준에서 기준을 만들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시중에서 과도하게 우려를 증폭하는 것은 오히려 국가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란 봉투법은 원청의 사용자 책임을 강화하고 노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남용을 막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상법 개정안을 두고는 “주주 이익을 보호하는 게 자본시장의 건전한 발전을 (촉진한다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문상현금화 |
























